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휴전 == [youtube(Be6jePq27_8)] 중국군의 춘계공세와 UN군의 반격 이후 1951년 10월 UN군의 추계공세 정도를 제외하면 양측 모두 더 이상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선전했지만, 중국군은 근본적으로 보병 위주였고, 보급의 수준도 낮아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한내에서만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잘 준비된 DMZ의 미군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국군의 연이은 공세 전략을 UN군측이 파악하고 대비를 하게 된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한국군을 돌파하는 건 가능했지만 이 역시 부담이 이전보다 커졌고, 순망치한이 명분인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김일성]]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애시당초 그의 군대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가을에 소멸되고 없었으니]] 중국의 뜻을 따를 수밖에. 한편 미국은 사실상 필수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지역의 방위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한국에 투입한 상황이고 한국군의 역량이 만천하에 증명된 이상 중국을 확실하게 밀어내려면 다른 지역 어딘가를 포기할 정도로 미군을 증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한반도는 이미 독립때부터 직접 관리하기보단, 다자간 관리를 하되 어느나라도 독점하지 못하는 땅으로 두려는게 미국의 판단이었고, 설사 중국까지 진격하더라도 소련의 참전가능성이 있었기에 더 이상의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주의 중국군 기지를 미공군이 일부 폭격했을때 소련은 미국에게 강력히 항의했기 때문에 소련의 참전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남한을 지킨다는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발을 뺄 때라고 판단했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 말했다. 맥아더도 길길이 뛰었지만 이미 트루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곧 미국의 각종 신문 1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맥아더의 해임 기사가 실렸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간 협상을 지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연일 UN [[공군]]으로부터 맹폭격을 당하느라 죽을 맛이어서 소련에 휴전을 간청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북한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주요 도시의 비행장과 공장 등이 UN 공군의 직접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원산]]은 공군의 공격에 더해서 [[해군]]의 포격까지 받았는데, 미국은 휴전 위반에 대비하여 경고로 이 지역에서의 포격을 휴전 발효 직전까지 수행했다. 당연하지만 당시 북한의 해공군 전력은 이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는 휴전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을 받는 등 북한 전역이 공군의 폭격 대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커티스 르메이|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한 바도 있고, 평양 시내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가 적절한 목표를 못 찾아서 폭탄을 쓰지 않고 귀환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는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이었다. 요컨대 평양의 비행구역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안 남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협상을 끌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21세기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이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미국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 [[케임브리지 5인조]]를 통해 미국의 핵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경멸했으며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에 패배하면, 압도적인 핵전력을 보유한 미국(1950년에 원폭 300개 소유.)이 중국과 소련(당시 원폭 5개 소유)에 핵공격을 퍼부어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스탈린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교착 상태의 한반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묶어놓고 싶어했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져 피를 흘리는 것은 중국과 북한이지 소련이 아니었다'''. 소련은 한반도에 중요한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고 군사고문단이나 소수 파일럿 정도만을 파견했지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거의 안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협상카드는 다름 아닌 [[MiG-15]]였다. 당장 중국은 6.25 개전 3일만에 대만해협에 미 7함대가 항모를 띄우자 아무 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대로 전무한 공군력을 가지고는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소련의 전투기를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했고, 스탈린은 이를 지렛대 삼아 상술한 6.25 전쟁의 장기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중국에 전부 외주를 줬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고서야 협상이 급물살을 타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협상 자체만 놓고 보면 협상 과정 중 가장 문젯거리였던 것이 [[포로]] 처우의 문제였다.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할 때, "일괄 송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 송환" 할 것인가? 즉 전자는 포로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고 포로의 출신국으로 '''일괄적으로''' 보내는 것이고, 후자는 포로 본인이 새롭게 살고 싶은 국가를 '''자유롭게 골라서'''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소설)|『광장』]]에서 주인공이 반복하는 '''[[중립국]]!''' 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 측은 일괄 송환에, [[유엔]] 측은 자유송환에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 소련과 중국과 북한은 자유 송환을 할 때 행여나 "자유 진영을 선택하는 자국민" 이 나타날까 근심했던 것이다. 반면 일괄 송환을 하게 되면 당사자의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포장하여 선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붙잡힌 북한군 [[포로]]의 상당수는 북한군이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징집한 남한 출신들이기 때문에 자유 송환으로 결론나면 이들 전원이 [[남한]]으로 갈 것은 분명했다. 중공군도 마찬가지로 항복한 이후 [[국부천대]]한 [[중화민국]]으로 귀순하는 병사들이 꽤 있었다. 포로 송환문제의 이면에는 이처럼 6.25 전쟁의 이념성이 드러난다. 양쪽이 정말 이를 악물고 두 주먹 꽉 쥔 채 크게 맞붙었던 마지막 시점인 춘계 대공세가 끝난 이후, 더 이상 물리적 힘으로 부딪쳐서 상대방을 꺾는 것이 한 쪽은 불가능하고, 다른 한 쪽은 그럴 가치가 없다고 결정한 것.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명분과 정당성, 이념'''으로 상대방을 꺾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세계의 거대한 두 축은 이와 같이 6.25 전쟁을 자신들의 이념 전쟁으로 변모시켰고 그만큼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휴전의 결과로 제시될 최종적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정해지기 전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 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휴전 협상 타결 전 최대한 북쪽으로 진격하기를 원하는 UN군이 주로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공산군이 주로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그 반대도 적지 않았는데 물론 휴전 시점에 전술적, 전략전 요충지를 최대한 점유하기 위해서였으며, 미국이 [[개성시]]를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한국으로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하려면 최소한 서부에서 내준 땅 이상으로 중동부 영토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에 절박한 입장이었다. 결국 목적은 달성했지만 2년간에 걸친 고지 전쟁 과정에서만 5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저격능선 전투]], [[화살머리고지 전투]] 등이 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휴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1953년 6~7월에 발생한 인명 피해는 그 이전 전체 기간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http://www.ddanzi.com/index.php?mid=free&bm=hot&document_srl=34157531|노병이 말하는 진짜 전쟁의 모습]] 1953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단독으로 [[거제도]] 등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였던 공산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 참고. 당시 [[대한민국]]은 휴전 협상 당사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소외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당장 1952년 8월 2일, 부산에서 이승만이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범인은 [[CIA]]요원으로, 이유는 협상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에버레디 계획]]으로 여러 번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에버레디 계획의 밝혀진 골자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300329111001&ed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5-03-23&officeId=00032&pageNo=11&printNo=15375&publishType=00010|이곳]]. ||1. 한국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유엔군 명령의 실천을 보장하라고 요구 2. 반항하는 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사령관으로 교체 3.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군에게 연료와 탄약 지원 중단 4. 한국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관 명령을 준수할 것을 요구 5. 반항하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구금 6. 유엔군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공포|| 그리고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이 긴급히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160시간의 언쟁 끝에 결국 소위 '''"소휴전 회담"''' (Little Truce Talks)이라고 불리곤 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 간의 혈맹이 시작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소휴전 회담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한국과 미국은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게 최초 2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 줄 것과, 차후의 장기 원조에 대해서 보증한다. 3. 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이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회담을 중단한다. 4. 미국은 한국의 육군 20여 개 [[사단(군사)|사단]]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에 대하여 승한다. 5. 한미 양국 정부는 정치회담에 앞서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당시 이승만의 행동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포로들에 대한 일괄 송환의 가능성을 본다면 인도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같은 행위는 [[제네바 협약|국제법]] 위반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이 표현상으로는 '포로 석방'이라서 단순히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곱게 풀어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석방이지 '''대탈주'''에 가까웠다. 당시 포로 수용소의 경비 및 관리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다. 따라서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군 및 한국 경찰 당국과 반공 포로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시에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탈출하고 이를 군과 경찰, 기타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탈출을 도와준 것. 실제로 [[유엔군사령부|UN군]]이 탈출을 진압하기 위해 가한 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포로들도 존재했으며, UN군과 한국군/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한 번 국면이 전환, [[화살머리고지 전투|2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425고지-406고지 전투]], 사미천 전투를 끝으로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밤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었다. 참전용사 증언에 의하면 이때 휴전 5분을 남겨두고 '''모든 탄약을 전부 소비했다 '''한다. 그리고 약속의 밤 10시 정각이 도래함과 함께 쌍방사격금지가 발효되었다. 참전용사들은 3년간 수없이 내내 듣던 총격과 포탄소리가 밤 10시 정각이 지나는 순간, 일순간 멈출 때의 그 정적감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kDZ5x_TntWk|예시]] 이렇게 기나긴 3년 1개월의 전쟁은 미완의 결말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